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생애 (문단 편집) === 무리한 산업화 정책과 긴축정책 === 이 역시 위에서 언급한 인구 정책과 비슷한 사례. 공업화로 해외에서 빌린 채무가 130억 달러에 이르자 엘레나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정부가 다른 나라에게 채무를 지고 있다는 것은 국치다."라는 발언을 했고, 그 국치를 씻기 위해 루마니아 정부는 모든 복지예산을 긴축하고 세율을 올려서 불과 9년만에 100억 달러의 채무를 다 갚았다. 믿겨지지 않겠지만, 1950년 ~ 1975년 사이에 루마니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국가 중 하나였는데, 이것은 외채를 끌어와 실시한 [[중공업]] 투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중공업 투자에만 너무 [[몰빵]]한 나라들이 결과적인 말로가 안 좋아졌듯[* [[소련]]과 [[북한]]도 마찬가지였고, [[1970년대]] [[대한민국]]의 불경기도 부분적으로는 [[박정희]] 시대의 지나친 중공업 과투자 때문이었다. 박정희 사후 집권한 [[전두환]]의 신군부가 이를 부분적으로 정리하고, 때마침 유가도 떨어지고 나서야 한국의 경기는 비로소 살아나기 시작한다.] [[루마니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50년대 ~ 1970년대에 루마니아는 루마니아의 곡창지대에서 생산되는 막대한 양의 농작물을 바탕으로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수준을 넘어 해외로 수출할 정도로 발달되어있었기 때문에 식료품 부족사태는 1960년대와 70년대 루마니아에서는 소련 지방도시나 중국에서나 벌어지던 일이라면서 비웃던 수준이었고, 경공업, 중공업도 상당히 발달되어있어서 석유가공으로 큰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는 서방과의 관계 개선으로 서방자본이 대거 루마니아로 흘러들어와있었고 그 영향으로 1970년대 루마니아는 [[자가용]]의 보급이 시작되고, 텔레비전과 세탁기 등의 가전제품이 대중화되었을 정도로 국민 생활 수준도 향상되고 있었다. 하지만 2차 [[오일 쇼크]]가 터진 이후로부터 상황은 점차 나빠지기 시작했다. 1차 오일쇼크 당시에는 루마니아는 제법 이익을 봤었고, 추가로 원유정제공장을 건설하기 위해서 대규모로 외채를 도입했는데, 막상 완공되었을 때는 2차 오일쇼크가 끝났을때라 원유정제로 큰 이익을 보지 못했고, 결국 막대한 빚으로 남게 되었다. 특히 1977년에 대지진이 벌어지면서 복구자금을 외국은행들로부터 대규모로 융자받아야 했던데다가, 1980년에 [[폴 볼커]]가 단행한 금리 인상으로 루마니아도 외채를 갚을 길이 막막해지자 차우셰스쿠는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긴축정책을 실시했다. 여기에 긴축정책의 대강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국제통화기금|IMF]]가 권고한 것이었다. 차우셰스쿠는 IMF가 권고한 목표를 맞추기 위해서 복지와 생필풍 공급을 축소하였다. 하지만 차우셰스쿠는 외채 채무 조정을 하기보다는 외국인 투자자들한테 꼭 갚을것이라고 큰 소리 치면서 자국민한테 빡빡하게 군것이 문제점이었다. 1983년도에 미국 부통령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도 루마니아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는것을 감안하여서[* 반대로 중남미 국가들은 푸대접했었다. 당시 페루 대통령 [[페르난도 벨라운데 테리]]가 자국의 경제가 막대한 외채로 어려움에 처해서 채무조정을 하려고 방미했을때 레이건 대통령과 30분만 만나고 결국 페루로 되돌아갔다는 일화는 이 당시의 미국의 정세판단력을 엿볼수있었다. ] 차우셰스쿠한테 채무 조정을 권했지만, 차우셰스쿠는 이를 거부하고 빚을 끝까지 다 갚았다. 1981년 가을부로 1954년에 폐지된 배급제가 다시 부활했다. 이에 따라 루마니아 국민들은 수출하고 남은 돼지 비계를 정제하여 하얗게 굳힌 라드, 소시지, 동물 내장, [[닭발]]같은 잡부위만 먹을 수 있었을 정도로 어렵게 살았고, 이마저도 몇 시간씩 줄서서 기다려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도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소련에 수출되는 루마니아산 고기의 양은 이전의 3배로 늘었고, 옥수수와 과일, 채소, 와인 등도 모두 수출되었다. 물론 외국 채권자들은 돈 잘 갚아주니까 굉장히 좋아했지만... 참고로 차우셰스쿠 정권 말기에 루마니아 국민들은 하루에 빵 300g을 배급받았고, 한 달 동안 돼지고기 500g, 치즈 200g, 식용유 반 리터, 설탕 1kg, 버터 100g, 달걀 5개만 배급받는 것으로 규정되었는데, 참고로 돼지고기 500g은 고작 두 끼 분량이었으며, 그 배급량도 명목상의 수치였지 이 수치만큼 제대로 배급받은 국민들은 없었다.[* 당시 루마니아의 식료품 통계는 '루마니아 전역에서 팔렸다는 차우셰스쿠가 쓴 책의 판매 부수만큼이나' 신뢰성이 없었다고 한다.] 비록 농업의 기계화 및 화학화 조치 덕분에 1950년에 인구 1인당 300kg 이상의 곡물이 수확되던 게 1982년까지 이 양은 1인당 1톤으로 증가하고 육류 생산량도 29.5kg에서 100kg으로 증가하였지만, 늘어난 물량들은 수출용으로 배정되었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에게 이 수치는 그림의 떡이었다. 이것이 상술한 에너지 절약 정책까지 겹치며 루마니아인들은 알바니아를 제외하고는 유럽에서 가장 낮은 생활 수준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1989년 기준으로 루마니아의 1인당 GDP는 약 1,818달러였는데, 이는 2022년 가치로 환산해도 4,363달러에 불과했다.] 게다가 당시 루마니아에서는 배급으로 받은 것 이외에 불법으로(?) 얻은 고기를 먹으면 감옥에 갈 수도 있었는데, 그럼에도 도시민들은 풍족하게 먹을려면 농촌에서 떨이로 파는 농축산물을 가져오던지 아니면 몇배의 웃돈을 주고 암시장에 가야만 했다. 그래서 이 당시 루마니아에서는 자동차 부품공장이나 식료품 공장에서 물건을 빼돌려서 웃돈에 팔아치우는 것이 재테크 수단이 되어왔다. 차우셰스쿠는 그럼에도 국민들을 잘 먹이려는 척도 하지 않고 오히려 '루마니아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으니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말만 끊임없이 되풀이했으며, 이런 상황을 보다못한 차우셰스쿠의 딸 조이아가 부모에게 식료품을 사려고 하루종일 슈퍼마켓 앞에서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고충을 부모에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차우셰스쿠 부부는 딸의 충고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고, 그나마 후계자인 니쿠가 시비우 책임비서로 재직되었을 당시에 조이아가 봤던 모습과 같은 광경을 본 뒤 충격을 받고 식량공급 요청을 했는데, 이를 못마땅해하면서도 식량공급을 개선해주기는 했지만 일부 지방에 그쳤을 뿐이다. 참고로 당시에 [[라틴 아메리카]]는 고이율과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빚을 제때 갚지 못하게 되면서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나라들이 부지기수였고, 설사 빚을 갚아낸다 해도 위낙 이자가 비싸서([[1980년대]] 기준으로 10%대) '수입은 안 하고 수출만 하기' 식의 경제 정책을 펴고 국민들을 쥐어짜서 매년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해도 빚을 줄이기 힘든 판이라 채무 탕감을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폴란드]]나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등의 다른 동구권 국가들 또한 1960년대 - 70년대 당시에 서구권에서 대거 차관을 들였는데, 오일 쇼크와 이자율 상승 2연파를 맞은 상황이라 경제구조적으로 빚을 갚아내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빚을 탕감해 달라고 적극적으로 요구하던 상황이었고, 유고슬라비아는 몇 차례씩 외채를 탕감받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루마니아는 고이율에 대해 몇번 말을 꺼낸 것을 빼면 별 다른 군소리하지 않고[* 정확하게는 1983년에 '돈 나중에 갚아줄 테니 제발 채무 좀 유예해 주세요'라는 식으로 나섰던 적은 있었다.] 꼬박꼬박 돈을 갚았으니 채권자들 입장에선 차우셰스쿠가 안 이쁠래야 안 이쁠 수가 없었다. 물론 이 때문에 루마니아 국민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만 했지만... 사실 외채를 갚기 위한 국민적 긴축정책은 상당히 많은 나라에서 실시되는 것이고, [[한국]]의 1990년대 말의 [[1997년 외환 위기|IMF 사태]]나 현재 [[그리스]]의 초긴축 정책도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과정의 하나였다. 문제는 외채가 차우셰스쿠의 사치에 의한 부분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산업투자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긴축정책은 [[모라토리엄]]이나 [[디폴트]]까지 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 특히 모라토리엄이 발생하면 국가신용도가 바닥이 되어 미래를 도모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긴축정책을 무리하게 실시해서 국민의 생활 수준을 아예 바닥으로 떨어뜨렸다는 것 자체로, 이 점은 [[빼도 박도 못한다|빼도 박도 못할 악행이 맞다.]] 외환위기 당시의 대한민국도 대량의 실업자와 노숙자를 양산시킬 정도로 어렵긴 했지만, 적어도 모든 국민들이 음식 찌꺼기 따위나 먹을 수준으로 퇴보하지는 않았으며, 다른 [[중남미]] 국가들에서도 부유층들이 호의호식을 했다거나 하는 얘기가 있긴 했지만, 차우셰스쿠는 한 나라의 지도자였음에도 국민들이 고통을 겪는 긴축정책 와중에서도 모범을 전혀 보이지 않은 채 사치나 부려대고, 국민들에게 밥은 못 주면서 출산이나 강요하는 일을 해댄 탓에 그에 대한 국민들의 증오가 커져서 나중에는 결국 몰락했다. 결과적으로는 제 무덤을 판 일인데, 그나마 국가적 신용도를 유지시킨 것이 긍정적인 요소다. 이것은 비단 루마니아만의 상황만이 아닌 구 공산권 전반에 만연했던 것이다. 국가동원체제를 십분 이용해서 대량의 인재와 노동력, 자본을 축적한 것은 좋았지만, 문제가 그것 대부분을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거대 중공업단지를 만드는 데에만 투자했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적 대중 동원을 통한 노동력 집약과 자본 일대투입은 공업화 시기(1945년 ~ 1973년)까지는 효과가 상당히 좋았지만, 첨단산업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그나마 사정이 나은 소련이나 [[동독]]은 첨단산업에도 투자했지만, 실패로 끝났다.]인 70년대부터는 비효율을 감당하지 못하고 죄다 망했다. 결국 남은 것은 철근과 콘크리트로 뒤덮인 흉물스럽고 낡은 잉여 공업단지 뿐이다. 물론 딱히 공산권에서만 벌어졌던 일은 아니고, 브라질이나 멕시코, 이집트, 페루, 알제리 등 많은 제 3세계 국가들이 비슷한 꼴을 겪기는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